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구(李萬求)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919

공훈사항

이만구 순경은 1927년 4월 19일 충남 당진군 송학리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충남도경 당진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곡성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4일 한강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자 당진경찰은 주요 시설 경비, 당진-화성, 당진-아산을 잇는 주요 보급로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7월 4일 수원을 점령한 적은 전차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경부가도를 남진했다. 충남경찰 비상경비사령관은 예하 경찰관서에 적의 오열과 지방공비를 색출하도록 특별 지시를 내렸다. 충남경찰은 군의 요청에 따라 경부선 주보급로 경비 임무를 수행했으며, 7월 11일 제1대대(충남·서울경찰)를 청양, 제2대대(충남·경기경찰)를 홍산에 배치하여 청양-대천 선에서 군과 함께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당진경찰서가 소속된 제1대대는 청양에 제1중대, 정산에 제2중대, 대천에 제3중대를 배치했으나 예산과 홍성에 적이 침입하여 홍성-대천 지역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제1중대는 예산 방면에서 남진 중인 적 유격대를 급습하여 20명을 생포했고, 홍성군 산성면에서는 적과 교전하여 포로 50명, 사살 2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7월 12일 공주를 점령한 북한군 제4사단은 일부 병력을 강경·논산으로 우회시켜 대전 점령을 기도했다. 7월 15일 제1대대장은 제1중대 130명을 직접 지휘하여 대천 방향으로 진격하여 집결해 있는 수십 명의 북한군을 포위 급습하여 사살 3명, 포로 2명의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 전투에서 지방 공비 40명을 사살했다. 제1대대는 7월 16일 청양으로 복귀하였으나 청양경찰서가 이미 후퇴하였으므로 대대장은 병력을 이끌고 전북 곡성으로 후퇴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다시 무주로 철수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9월 16일 총반격을 개시함에 따라 적은 낙동강 방어선으로부터 서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주·진안지역에서 게릴라 전술로 적 부대에 타격을 가하고 정보를 수집하던 당진경찰은 9월 19일 북으로 퇴각하던 적 부대를 발견하고 기습 공격을 가하였다. 이 순경은 적 2명을 사살하고 계속해서 적을 공격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구 순경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5-ㄱ-065)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