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린규(이린규)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1804865
  • 전몰일자 : 19500705

공훈사항

이린규 일병은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추동리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1950년 초 수도사단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소총병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수도사단은 서울 경비 임무를 수행하면서 유사시 전방지역으로 투입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에 기습적으로 침략하자, 이린규 일병이 소속된 수도사단은 제7사단이 담당하고 있던 동두천 축선으로 증원되었다. 북한군은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40여 대의 T-34전차를 투입해 공세를 감행하고 있었다. 개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38도선의 방어선이 대부분 무너졌으며, 수도 서울의 방어가 위태로워졌다. 이에 육군본부는 서울 방어를 위해 수도권의 부대는 물론 후방지역의 부대까지 모조리 서울 북방에 투입하도록 명령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과 전차부대는 6월 25일 오전 초성리를 돌파해 동두천으로 진격하였다. 이 일병은 의정부를 거쳐 창동 방어선으로 철수하면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해 국군의 방어선은 오랫동안 지탱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린규 일병과 장병들은 주저항선인 동두천 북쪽 소요산 일대의 진지로 철수하여 남하하는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면서 진지를 사수했다. 이 일병과 장병들은 북한군의 보전협동부대를 저지하였으나 서측으로 우회한 북한군의 위협을 받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수도사단은 탄약을 재보급받지 못한 상황에서 북한군 제107전차연대 소속의 전차 수십 대를 앞세운 북한군의 총공격을 받아 소요산 일대의 주저항선이 돌파되기 시작하였고, 10시간에 걸친 혈전에도 불구하고 동두천 방면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되는 난항 속에 북한군은 6월 27일 저녁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하고, 6월 28일 새벽 서울에 진입하였다. 이 일병과 장병들은 소부대 단위로 분산된 채 삼송리를 거쳐 행주로 철수해 한강을 도하하였다.
이 일병과 사단 병력은 오류동 일대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후 7월 3일 한강방어선이 무너지자 지연전 및 재편성을 병행하며 낙동강방어선까지 철수하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린규 일병은 1950년 7월 5일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린규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109-ㅎ-00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