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득영(이득영)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23617
  • 전몰일자 : 19510910

공훈사항

이득영 일병은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월용리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했던 1950년 12월 초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배치되어 조교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병력 확보와 각 지역방위 임무를 동시에 해결할 목적으로 7월 초순, 각 도에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했다. 이에 따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가 대구에서 창설되었고, 신병교육을 위해 7월 11일에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으나, 이후 7월 17일에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고, 8월 1일에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다가, 8월 14일에 육군본부 직할로서 육군 제1훈련소로 개칭되었다. 같은 날 부산에 육군 제2훈련소가 창설되고, 이어 육군 제3·5·6·7훈련소가 창설되었는데, 이중 육군 제5훈련소는 8월 22일 제주도 모슬포에서 창설되었다.
이득영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951년 1월 중순, 육군 제2훈련소는 신병 교육뿐만 아니라 지역방위 임무도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부산지역은 유엔군의 병력과 물자가 증원되는 항구이며, 임시 수도가 위치한 곳으로 아군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반면 적 게릴라들에게는 후방을 교란할 수 있는 공격목표들이 많이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한 후에는 미처 도주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유엔군의 주요 병참선을 통제할 수 있는 주변 고지에 위치하며 후방교란 활동을 계속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으나, 후방지역 교란 활동은 더 활발했다. 이에 훈련소는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해 왔다. 그러던 중 9월 10일 부산항 인근에 적 게릴라가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득영 일병이 소속된 기동타격대는 즉각 출동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들의 기습사격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득영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0면-21759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6-ㅍ-07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