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득수(이득수)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001012
  • 전몰일자 : 19510306

공훈사항

이득수 일병은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낙동강 선까지 남진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다. 이 일병은 1950년 8월 20일 제7사단 제3연대에 입대했다.
제7사단은 제3·5·8연대와 제5포병대대를 예하부대로 하여 창설되었다. 연대는 9월 3일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경주 부근의 무릉산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의 마지막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추격작전 때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청량리에 도착했다.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연대는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비호산 일대에서 방어로 전환했다. 3일 연대는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연대 장병들은 7일까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고 비호산을 지켜냈다.
11월 14일 연대는 덕천으로 진격했고,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연대는 26일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연대는 12월 15일까지 승호리-신계-연천-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춘천 부근의 38도선 일대에 방어 진지를 편성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은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개시했고, 연대는 북한군 제2군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평창 일대를 내주고 후방으로 후퇴했다. 적은 계속해서 영월을 점령하려고 기도했으나, 연대는 17~18일 양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Operation Killer)’(2. 21.~3. 6.) 때 연대는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평창군 백석산 일대까지 진출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용감하게 앞장서서 진격하다 적탄에 맞아 3월 6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득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0면-21758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8-ㅂ-00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