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두원(李斗元)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38302
  • 전몰일자 : 19501128

공훈사항

이두원 일병은 경상북도 달성군 동촌면(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던, 1950년 8월 하순경 카투사(KATUSA, 주한 미군에 파견된 한국군)병으로 선발되어 경상남도 구포에 위치한 육군 제3훈련소에 입대했다. 이두원 일병은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에 美 제8군으로 배치되었으나, 이후 부대조정에 의해 다시 육군직할 헌병사령부로 배치되었다.
한편 육군직할 헌병사령부는 美 군정 시절인 1947년 3월 15일에 군감대로 설치하여 운용하다가 1948년 3월 11일에 군기사령부(조선경비대)로 창설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12월 15일에 병과 명칭을 헌병으로 변경했다. 이후 1949년 1월 16일에 서울 용산에서 헌병학교가 창설되어 운영되다가 6·25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13일 임시 폐교되었다.
그러나 야전헌병 양성을 위해 8월 27일부터 1951년 6월 20일까지 부산에서 헌병교육대를 설치하여 운영했다. 당시 헌병의 임무는 후방지역에서의 질서유지와 피난민 속에 침투하는 적 오열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이두원 일병이 헌병사령부에 배치될 무렵은 국군과 유엔군이 9월 16일부터 반격작전을 실시하여 10월 1일에는 국군 제3사단이 38도선을 돌파하고, 10월 26일에는 제6사단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다. 이두원 일병이 소속된 헌병대는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 및 두만강으로 진격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북한군 오열들이 후방을 교란하고 있어, 적 오열 색출 및 질서유지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이두원 일병은 헌병요원들과 함께 북쪽으로 이동하여 금천-사리원-평양-개천 지역에서 질서유지 활동을 실시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통일을 향한 총공세를 펼쳤으나 10월 24일과 11월 24일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두원 일병은 38도선으로 후퇴하는 국군의 병력 수습과 교통통제, 낙오자 통제 등의 임무를 수행 중 11월 28일 중공군의 포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두원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41판-7면-20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4-ㅅ-019)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