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두수(李斗首)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801582
  • 전몰일자 : 19501126

공훈사항

이두수 일병은 경상남도 창녕군 고양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몰 일자를 고려할 때, 이 일병은 1950년 5월경에 입대한 후 제8사단 제2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제21연대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을 받았다. 아군은 짙은 안개와 적의 양면 기습으로 인하여 적의 병력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불리한 전투를 개시하게 되었다.
국군은 1950년 9월 16일을 기점으로 미군과 함께 반격작전을 시작했다. 제8사단은 북한군의 기습 공격에 지연전을 펼치고 1950년 8∼9월에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고 이후에 북진에 성공했다. 그 결과 제8사단 제21연대는 1950년 10월 8일 38도선을 통과하여 북한 깊숙이 진출하였지만 1950년 11월 9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직면했다. 이에 제8사단은 묘향산 동쪽의 영원과 맹산 지역에서 방어태세를 강화하여 중공군 제42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의 제1차 공세가 끝나고 소강상태가 지속되자 중공군이 또다시 조직적인 공격을 가해오기 이전에 전쟁을 종결시키는 계획을 수립해 1950년 11월 24일 총공세를 단행했다. 그 중 제21연대는 형제봉-관리 전투에 참가하여 대규모의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진지의 일부를 잃고 맹산 북쪽의 소가래봉으로 탈출했다. 탈출을 완료한 제21연대는 매재령의 차단 진지를 돌파한 후 북창을 경유해 가창으로 철수하기에 이른다. 이때 맹산이 위협받게 되어 제21연대는 측방으로부터 침투하는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해 지연전을 펼쳤다. 그 결과 제8사단은 제2군단의 집결지인 평양 동쪽의 삼동에서 38도선을 향해 철수를 했고 율리, 수안, 신계, 시변리를 경유하여 토산을 향하여 진격했다.
이후 제8사단은 1950년 11월 27일까지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또 한번의 방어 전투를 실시했다. 중공군은 제126사단을 동부 산악지대로 우회시켜 맹산 동북쪽 애창천 계곡, 즉 사단의 배후로 침투시켰다. 하지만 수색 정찰로 이를 확인한 제21연대는 연대의 애창 방어진지를 우회하여 맹산에 집결한 중공군과 교전하였고 그 결과 중공군과 제21연대 모두 일부 병력이 분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 일병은 1950년 11월 26일 전투 중 총탄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두수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0판-2면-03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9-ㄴ-07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