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두수(李斗洙)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227517
  • 전몰일자 : 19530612

공훈사항

이두수 이등중사는 1931년 10월 25일에 경상남도 사천군 남양면(現 사천시 남양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발발 후 중공군의 참전으로 조국이 다시 위기에 처하자 1950년 12월 중순경 입대하여, 부산에 위치한 육군 제2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5사단 제27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두수 이등중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1951년 1.4후퇴로 평택-안성선까지 물러난 국군과 유엔군은 전력을 회복한 후 총반격을 개시하여 서울을 재탈환하려던 상황이었다. 제5사단은 춘천-가평-횡성-영주-안흥 일대에서 격전을 치르면서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와 2월 공세를 막아냈고, 태기산 전투(3월), 소양강-인제지역 전투(4월), 홍천북방지역 전투(5월), 현리-서화지역 전투(6월) 등에 참가하여 중공군 춘계공세를 저지했다. 이후 사단은 장평-봉화봉을 잇는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으로 진격하면서 반격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그 후 사단은 8월 31일 가칠봉 북쪽의 1,211고지와 서희령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최초 제27연대는 주공으로 9월 4일 사단목표인 가칠봉 동북쪽 능선과 서희령을 점령했다. 이어서 사단은 9월 5일부터 10월 9일까지 세 번씩이나 1,211고지를 점령 및 상실을 거듭하다가 10월 14일에 가칠봉 전투를 종결했다. 사단은 이 전선을 10월 20일 국군 제3사단에 인계하고 양양으로 이동했다.
1952년 1월 23일부터 사단은 동해안 554고지-351고지-감호일대를 잇는 전선방어에 투입되었다. 전선은 7월 초까지 소강상태이다가 적이 7월 10일 대규모 공격준비사격 후 침공하여 사단의 방어진지가 피탈되었다. 그러나 사단은 수차례의 역습으로 3일 만에 351고지를 탈환하며 주방어선을 지켜냈으며 11월 초까지 몇 차례의 소규모 침공을 격퇴했다. 이후 사단은 11월 10일 이 전선을 제15사단에 인계하고 간성으로 이동하여, 1953년 4월 15일부로 제2군단 배속으로 김화지역 제3사단 전선을 인수받아 949고지-973고지-883고지를 잇는 전선을 방어하게 되었다.
사단 전방의 중공군이 5월 12일 사단 전초진지를 공격해 왔으나, 사단은 17일까지 4차례의 역습을 실시하며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했다. 제27연대는 중공군의 6월 공세 시 주저항선의 우측 전방 883고지 일대를 방어하며 6월 15일까지 혈전을 거듭했으나, 결국은 적에게 주저항선을 빼앗기고 북한강 동·서안의 등대리-후동-널우골을 잇는 선까지 후퇴하여 新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 전투에서 이두수 이등중사는 소대원을 지휘통제하며 방어진지를 사수하다가 6월 12일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두수 이등중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35-ㅈ-09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