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두성(李斗星)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730

공훈사항

이두성 순경은 1929년 5월 10일 전남 광산군 월성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남도경 광산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정읍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순경은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기습남침을 감행하자 치안국은 전시 비상경비총사령부 체제로 전환했다.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군경부대가 남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광산경찰은 장성-광산, 광산-함평, 광산-나주, 광산-광주를 잇는 주요 도로 통제, 주요 시설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한강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자 전남경찰국은 각 서(署)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전북경찰국에 배속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투부대를 편성했고, 광산경찰서 병력도 전투경찰로 재편되었다.
7월 23일 북한군이 전차 6대와 트럭을 이용하여 정읍을 거쳐 광주로 진격하자 광산경찰을 포함한 전남경찰은 화순-벌교를 거쳐 순천으로 철수했다. 광주에는 북한군 500-600명이 야포 3문과 함께 진입했으며, 1개 연대규모의 병력이 뒤따르고 있었다. 전남 서남부지역 경찰은 화순 남쪽 산악지대에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접근로를 파괴하는 등 적의 공격에 대한 거부작전을 실시했다.
광산경찰은 하동을 거쳐 마산으로 이동하기 위해 7월 23일 이동을 개시했으나 일부 적이 구례를 거쳐 하동으로 진격하는 바람에 하동의 퇴로가 막혔다. 이에 전남경찰병력(200명)은 순천에서 여수로 기동한 후 선박 편으로 7월 26일 오후 5시에 삼천포에 도착한 다음 곧바로 하동지역으로 기동했다. 그러나 7월 30일 진주가 포위되자 경찰 1,000여 명과 군병력 1,000여 명은 적의 포위망을 벗어나 의령이나 함안 방면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날 이 순경은 적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두성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9-ㅌ-014)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