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두섭(李斗燮)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7622
  • 전몰일자 : 19501024

공훈사항

이두섭 일병은 경상남도 부산시 동구 수정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전 38도선 일대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잦았던 시기인 1950년 4월 중순경 육군에 입대하여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육군통신학교에서 통신 주특기교육을 받고 자대로 충원되어 교도대에 배치되었다.
육군 직할 통신학교는 1947년 10월 23일 통신교육대로 개칭되었다. 이후 통위부에서는 1948년 6월 15일에 직속으로 제51통신대대를 창설하여 통신교육대에 예속시켰고, 이는 무선통신교육대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무선통신교육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맞춰 육군 직할 통신학교로 발족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약한 병력과 장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방어하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6월 25일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연대를 제7사단에, 그리고 오후에는 제18연대(-1)도 추가로 배속했으며, 제8연대마저 제6사단에 배속하여 가평지구에 투입했다. 6월 26일 저녁에는 육본 장교연대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하여 창동 지역에 배치했다.
전쟁 발발 후 곳곳에서 통신이 두절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육군본부에서는 통신학교에 전방 사단과의 통신을 소통시키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에 통신학교 교도대는 즉각 제7사단 지역으로 출동하여 육군본부와의 통신 소통을 위해 노력했다.
이두섭 일병과 제7사단 부대원들은 의정부-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전투력 열세로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어주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한강선 방어 작전을 전개했다. 이후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실시하여 7월 말에는 낙동강에 이르렀다.
이두섭 일병과 사단 병력은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선에서 강력한 방어 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최후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한 후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어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해 한・만 국경에 도달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불법 개입한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1950년 11월 초순부터 38도선 이남으로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이두섭 일병은 1950년 10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작전에 참가하여 통신망 확립을 위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중공군 침투부대와 교전 중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두섭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15판-1면-06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3-ㅍ-079)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