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두섭(李斗燮)

  • 군별 : 육군
  • 계급 : 소위
  • 군번 : 230202
  • 전몰일자 : 19500625

공훈사항

이두섭 소위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전 38도선 일대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잦았던 시기인 1950년 3월 중순경 입대하여,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육군보병학교에서 장교 교육을 받고 同 학교 교도대로 배치되었다.
이두섭 소위는 경계와 교육훈련에 전념함으로써 육군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부족한 장비와 병력으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직할부대를 전투부대로 동원해 의정부지구에 중점을 두면서 서울방어를 위해 노력을 경주했다. 육군은 우선 육군본부 직할의 모든 재경부대를 동원해 전방의 제1사단과 제6사단,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증강했다.
수도사령부 예하 제3연대를 제7사단에 배속한 데 이어 오후에는 제18연대(-1)마저 추가로 배속하였으며, 제8연대를 제6사단에 배속해 가평지구로 투입했다. 또한 서울 특별연대는 제1사단에, 전투경찰 1개 대대가 배속된 육군사관학교 생도대대는 제7사단에, 포병학교 제1교도대대는 제1사단과 제6사단 그리고 제7사단에, 제2교도대대는 제7사단에, 독립기갑연대 제1대대는 제1사단과 제6사단 그리고 제7사단과 제8사단에 배속했다. 6월 26일 저녁에는 육본 장교연대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시켜 창동 지역에 배치했다. 이두섭 소위는 장교연대에 편성되어 전투에 투입되었다.
창동 방어선에는 국군 5개 연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실제 병력은 1개 연대 규모에도 못 미쳤다. 국군은 우이동-92고지(수유리)-278고지(수락산 서남단)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했다. 하지만 장교연대는 실질적인 전투 병력이 없었기에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국군은 의정부-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전투력의 열세로 계속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6월 27일 새벽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을 가했다. 장병들은 일제 사격을 가했으나 전차는 피해 없이 남진했고, 실탄을 전부 소모한 국군은 미아리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이두섭 소위는 6월 26일 수유리 일대 92고지에서 소대원을 지휘통제하며 북한군과 교전 중 적의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두섭 소위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48판-1면-13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9-ㅅ-064)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