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두림(李斗림)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707327
  • 전몰일자 : 19500906

공훈사항

이두림 일병은 1931년 12월 15일에 전라북도 전주시 노송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정치·사회적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50년 초, 서울 용산의 제1훈련학교로 입대하여 중기관총 교육반을 수료한 후 제9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제9연대는 당시 제7사단의 우측 부대로서 포천 정면의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기습공격을 했을 때, 제9연대는 38도선 경비 임무와 교육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두림 일병이 소속된 대대는 금오리 일대에서 훈련을 하다가 연대장 명령에 의거 신속히 천주산(434고지)-가랑산(350고지) 간의 주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은 공격 첫날이 25일 오전 11시에 적 전차부대가 포천을 점령하고, 오후 4시에 적 보병부대가 포천을 점령했다. 연대 장병들은 태릉으로 철수하여 육사교장 지휘로 불암산 동남쪽 210고지를 점령하여 적에 대항했다. 그러나 6월 28일 아침에 서울이 함락되고 육군본부가 대전으로 철수하는 와중에 연대 장병들은 망우리고개-용마산을 거쳐 광나루로 철수했다. 이후 7월 5일 평택에서 부대를 재편성할 때에 제9연대는 해체되고, 장병들은 수도사단 제1연대에 편입되었다.
이두림 일병이 소속된 제1연대는 7월 6일 진천으로 이동하여 13일까지 북한군 제2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청주 미호천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14일까지 적의 진출을 지연시켰다. 이후 7월 28일에 제1연대는 안동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8월 1일에 무질서 속에서 길안(佶安) 방면으로 이동했다가 5일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8월 공세에 밀려 의성으로 철수했다. 이후 제1연대는 육본 명에 의거 13일에 안강 지역으로 투입되어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후 9월 2일에 시작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맞이하여 강력히 저항했으나, 9월 4일에 형산강 이남의 호명리 선으로 철수했다. 그곳에서 연대는 9월 6일에 적의 공격이 있었지만 격퇴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두림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9판-7면-11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2-ㄴ-05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