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두기(李斗基)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21414
  • 전몰일자 : 19520715

공훈사항

이두기 일병은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압록강을 향해 북진작전을 실시하던 1950년 10월 중순, 제주도에 설치된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2사단 직할부대인 통신대로 배치되었다.
제2사단은 11월 7일부로 서울에서 재창설되었으며, 이후 12월 중순에 포천 북방의 양문리-탑두울을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얼마 후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중공군의 신정공세(3차 총공세)로 서울을 압박했다. 사단은 1951년 1월 1일 새벽에 진지에서 이탈하여 1월 7일에 충주에 집결했다. 이후 2월 13일에 안동으로 이동하여 일월산과 보현산 일대에서 패잔병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이두기 일병이 소속된 제2사단은 공비소탕작전을 완료하고, 4월 28일에 다시 미 제9군단으로 배속되어 청평지역으로 이동하여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하여 육단리-적근산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자, 유엔군사령관은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예하 부대에 적극적인 공세적인 행동을 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제2사단은 방어진지 전방의 감제고지인 745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두 차례(8월2일~8일, 9월 1일~3일)에 걸친 공격으로 탈취했다. 이후 사단은 10월 13일에 김화-금성진격작전을 개시하여 10월 18일까지 연대별로 교대로 공격하여 김화 북쪽 14km에 있는 금성까지 진출하여 금성천 분지를 확보했다. 이두기 일병이 소속된 통신대는 전방 연대를 원활히 지원하여 사단과 통신망을 잘 유지토록 하여 작전의 성공을 보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다가 사단은 1952년 3월 10일부로 미 제9군단으로부터 배속해제 되어 사창리 일대로 이동했다. 사단은 사창리 일대에서 야외기동훈련을 실시했다. 이후 제2사단은 1952년 6월 1일부로 미 제9군단에 재배속되어 김화 동쪽의 남대천 일대 주저항선에 배치되어 있던 미 제40사단의 진지를 인수했다. 이두기 일병이 소속된 수색대는 수시로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여 사단에 보고했다. 그는 7월 15일에 소대원들과 함께 적진으로 침투하여 적정수집을 하던 중 적 부대에 발견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는 전투 중 적의 총탄에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두기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07판-8면-13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0-ㄹ-02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