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휘(李東輝)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84720
  • 전몰일자 : 19510512

공훈사항

이동휘 일병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서 1929년 11월 20일에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이 일병은 1951년 1월 3일에 입대 후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8사단 제10연대에 배치되었다.
제8사단 10연대 장병들의 분전과 신병의 대거 투입에도 불구하고 좌·우측 전선이 돌파됨에 따라 강원도 홍천군 방면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8사단 10연대 장병들은 목계리를 경유해 황강리로 이동하여 부대 정비에 임하였다. 제10연대 장병들은 2월 강원도 횡성군에 주저항선을 설치하고, 적의 공세에 대비해 방어진지를 철저히 구축했다.
중공군은 서부 전선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병력을 가평~홍천 일대에 집결시켜 양평부터 횡성 일대에 공세를 계획하였고 첫 번째 목표는 제8사단 10연대가 배치된 횡성이었다. 미 제10군단 또한 한강 남안에서 홍천까지의 경로를 확보하여 서울 재수복을 하기 위한 라운드 업 작전을 계획하였다.
제10연대를 비롯하여 소속 연대들은 1951년 2월 4일부터 집결과 함께 진격을 개시했다. 아군과 적군은 고지 선점을 위한 수 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중공군의 유인책이었고, 1951년 2월 11일부터 중공군 제4차 공세가 전개되었다.
결국 제8사단 10연대를 포함하여 모든 연대는 중공군에 의해 고립된 채 후방이 포위되었고 제8사단 10연대는 포병 1개 대대와 전차 5대로서 포위를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소부대로 분산되며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제8사단 10연대는 중공군의 제4차 공세로 장교 약 300여 명과 사병 약 7,000여 명이 전사 및 실종됨에 따라 남은 인원은 3,000여 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제8사단은 1951년 3월 대구로 이동하여 전력을 재정비하고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제10연대 장병들은 전력 보강 이후 1951년 4월 3일 호남 지구 무장공비토벌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금산·정읍·순창·부안군 일대에 지역 좌익 및 북한군 낙오병이 합세함에 따라 공비는 약 3,0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민가, 도로, 행정 시설 등에 대한 유격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비 토벌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 일병은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적탄에 맞아 1951년 5월 12일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휘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유해(24묘역-9판-855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2-ㄷ-01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