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환(李東煥)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30131

공훈사항

이동환 순경은 1931년 5월 10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남도경 영광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영광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군경부대가 남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영광경찰은 고창-영광, 장성-영광을 잇는 주요 도로 통제, 주요 시설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임무를 수행했다. 한강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자 전남경찰국은 각 서(署)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전북경찰국에 배속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남전투경찰부대를 편성하였으며, 영광경찰서 병력도 전투경찰로 재편되었다.
7월 31일 북한군 대대병력이 강진-장흥을 공격하자 전남 비상경비사령부는 8월 1일 영광·영암·광산·나주·무안·장흥·강진의 경찰병력을 완도로 철수시켜 해상유격전을 펼치도록 했다. 당시 완도에는 완도서장 이하 200명이 대한청년단원 100명과 함께 치안을 확보하고 있었다. 완도에 상륙한 전남경찰부대는 완도병력 300명과 나주병력 270명, 화순병력 60명으로 본부를 경비하도록 하고 나머지 병력은 청산도에 주둔시켰다. 영광서원 40명과 무안경찰서 선박부대 90명은 부산으로 이동하여 후방지원을 하도록 했다. 선박 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박 경사는 부산지역 후방 치안 유지 임무에 들어갔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영광경찰은 10월 3일 영광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치안유지와 잔적소탕작전을 전개했다. 이 순경은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가 주관하는 공비섬멸 작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 작전이 끝난 후 이 순경은 서남지구 전투부대에 편성되어 제1기(1951.12.1.-12.14), 제2기(1951.12.16.-1952.1.4.), 제3기(1952.1.5.-1.31), 제4기(1952.2.4.-3.14) 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953년 1월 31일 공비 수 명이 야간에 영광경찰서를 습격하여 영광 경찰병력과 공비들 간 교전이 벌어졌다. 이 순경은 공비들을 격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환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100-ㅊ-035)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