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화(이동화)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7906392
  • 전몰일자 : 19510212

공훈사항

이동화 하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로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몰 일자를 고려할 때, 이 하사는 1950년 5월경에 입대한 후 제8사단 제2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하사가 부대에 전입했을 당시 제8사단은 강원도 인제군부터 양양군 일대에 이르는 지역에서 38도선의 경계를 책임졌고, 제21연대는 유격대 소탕작전 중에 있었다.
이후 196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해 아군은 전방에 배치된 제10연대로 하여금 지연전을 실시하고 제21연대를 강릉군 방면으로 이동시켜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그러나 적 주력의 서측 우회가 우려되면서 이에 제8사단 제21연대는 제10연대에 배치되어 북한군과 격전을 펼쳤다.
제8사단 제21연대는 1950년 11월 23일부터 11월 28일까지 평안남도 영원, 맹산지역에서 중공군 제42군의 공세로 4일간의 방어전투를 전개한 후 철수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제21연대는 1950년 12월 1일 제2군단의 집결지인 평양 동쪽의 상동에서 38도선을 향하여 철수를 거듭하여 율리에서 수안을 거쳐 신계, 시변리를 경유했다. 토산에 도착한 제8사단 장병들은 38도선의 바로 북방에 위치한 연천으로 집결하기 위해 1950년 12월 9일 토산을 출발했다.
제8사단 장병들은 수나 장비가 열세한 와중에 경기도 연천 부근의 요충지인 520고지를 향하여 돌진하여 점령했다. 하지만 제21연대의 화력은 중공군에 비해 열세했고 적군의 우회침입작전에 직면하여 필사적으로 포위를 뚫고 철수했다. 제8사단은 1950년 12월 24일에 중공군 제66군 소속 3개 사단의 침입을 방어했다.
중공군은 이 일대에 대병력을 투입하여 국군과 유엔군에게 포위를 시도했다. 제8사단 장병들은 가까스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지연전을 전개했다. 제21연대 장병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11월간 평안도 일대에서 철수했다. 1950년 12월 31일부터 익년 1월 초순까지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개시되었다. 제8사단은 강원도 화천군에서 분전했지만 병력의 열세로 철수했다.
1951년 2월 11일부터는 중공군 2월 공세가 전개되어 상황은 국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특히 제8사단이 적군의 집중적 공격을 받았다. 결국 제8사단은 지휘 통신이 두절되고 후방의 사단지휘소까지 공격 받아 원주군 방면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하사는 1951년 2월 12일 중공군 2월 공세가 시작된 다음날, 전투 중 총탄에 맞아 인제에서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화 하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9-ㄹ-10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