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화(이동화)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1105505
  • 전몰일자 : 19511128

공훈사항

이동화 일병은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9년 12월 초순 제1연대에 현지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예하부대로 배치되었다.
제1연대는 1946년 1월 15일 경기 양주에서 창설되어, 1949년 5월 12일 수도사단에 예속되었다. 수도사단은 동년 6월 10일부로 제7사단으로 개칭되어 동두천 축선의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약한 병력과 장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방어하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여러 직할부대를 동원하여 전방의 제1사단, 제6사단,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강화했다. 사단은 노량진, 안양 일대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으나, 전투력 손실이 심해 7월 5일 해체되어 제1연대는 제8・18연대와 함께 수도사단(수도경비사령부로 개칭) 예하부대로 재편되었다.
이후 제1연대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그와 연대병력은 강릉에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2월 25일부터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이후 이동화 일병과 장병들은 3월 9일 속사리 일대 적 지역을 위력 수색해 북한군을 멀리 구축하였고 3월 26일 제2차로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캔자스 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5월 7일 중공군 제6차 공세가 시작되어 설악산 부근의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후 이 일병과 연대는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미 제8군의 작전에 참가하여 서화리 동북방의 924고지를 점령하였다. 추계공세작전에서 월비산을 탈취하고 남강까지 진출한 이 일병과 연대병력은 11월 16일-17일에 후방지역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창설된 백야전사령부에 배속되어 호남지방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언제나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사력을 다해 분전하던 이동화 일병은 1951년 11월 28일 구례 부근 전투에서 북한군의 기습사격을 받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화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40면-21737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26-ㅅ-09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