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화(李東和)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8824
  • 전몰일자 : 19500808

공훈사항

이동화 일병은 경상북도 영천시 청도군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몰 일자를 고려할 때, 이 일병은 1950년 5월경 입대 후 제8사단 직할부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부대에 전입했을 당시, 제8사단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 제5사단의 엄청난 포병 화력의 지원을 방어하고 있었다.
7번 도로 축선에 투입하여 주문진으로 진격을 개시한 북한군에 맞서 강릉에 주둔해 있던 제8사단은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지연전을 펼쳤지만 적의 화력에 주문진을 상실하고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를 완료한 제8사단은 증원을 기다리며 연곡천 주저항선에 병력을 배치하고 사천국민학교에 사단 전술 지휘소를 설치했다. 당시 제8사단의 방어구역은 연곡천부터 송림리에 이르는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는데 연곡천은 수심이 깊어 도섭이 불가능했고 자주포를 포함한 중장비 또한 통과할 수 없었다. 이에 제8사단은 연곡천 부근에 살상지대를 설정하여 적을 유인, 격멸하려고 했으나 적은 곧바로 공격해오지 않았다.
제8사단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주저항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천마봉을 공격해 탈취함으로써 주문진 재탈환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얼마 후 북한군은 천마봉과 아군의 주저항선을 동시에 공격해왔고 전쟁초기 북한군의 화력은 아군에 비해 우세했기 때문에 아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를 완료한 제8사단은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했으며 적시에 도착한 증원병력과 함께 북한군의 진격을 막고자 했다. 이후 북한군 제8사단은 1950년 7월 장갑차를 앞세워 풍기 읍내로 진출하였다.
이에 아군은 영주군의 안정면 동촌리에서 부석면 용암리에 걸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그 결과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북한군의 남하를 10일간 저지하였다.
적군 1개 사단은 1950년 8월 1일을 기하여 안동을 습격하기 위해 동측으로 우회하여 집결해 있었다. 당시 제8사단은 북한군의 남하를 10일간 저지하고 후속으로 남하하는 중이었으나, 집결해 있던 적의 1개 사단의 기습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8사단은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도 적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분전하였고,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1950년 8월 8일 적군의 총탄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화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0판-7면-07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7-ㄷ-027)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