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호(李東浩)

  • 군별 : 육군
  • 계급 : 소령
  • 군번 : 11000
  • 전몰일자 : 19500715

공훈사항

이동호 소령은 1926년 2월 27일 서울시 중구 무교동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광복을 맞이했으나, 조국은 분단되어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조국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군입대를 결심하고, 1947년 10월 초순 서울 태능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 제5기로 입교했다. 이곳에서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1948년 4월 6일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
이동호 소령이 전선에 부임할 당시 38도선 일대에서는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후방지역에서도 북한의 무장공비와 남한 내 공산주의자 등에 의해 발생한 소요 사태로 인해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동호 소령가 소속된 사단은 38도선에 배치되었다. 이 소령의 지휘 아래 장병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당시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무기인 2.36인치 로켓포는 북한군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다. 개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38도선의 대부분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계속되는 난항 속에 북한군은 6월 27일 저녁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하고, 6월 28일 새벽 서울에 진입하였다. 이 소령이 지휘하는 사단 장병들은 소부대 단위로 분산된 채 삼송리를 거쳐 행주로 철수해 한강을 도하하였다. 이어 김포공항을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과 격돌하였다.
이동호 소령의 진두지휘 아래 장병들은 오류동 일대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후 7월 3일 한강방어선이 무너지자 지연전 및 재편성을 병행하며 시흥지구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사단은 평택-진천-청주-보은-안동으로 철수하였다.
이동호 소령은 장병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앞장서서 솔선수범하는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위기에 놓인 조국을 내 손으로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최후까지 싸웠으나 끝내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1950년 7월 15일 남일면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호 소령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을지무공훈장(훈기번호 134 육, 204 국)을 추서하고 유해(15묘역-3판-50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2-ㅋ-03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