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현(이동현)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001664
  • 전몰일자 : 19510812

공훈사항

이동현 일병은 출생 일시 및 장소가 확인되고 있지 않다. 당시 계급 및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 등을 고려할 때,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지연전을 수행하던 1950년 7월 15일, 대구의 육군 제25교육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7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동현 일병이 부대로 배치되었을 때, 제17연대는 포항전투사에 배속되어 낙동강방어선의 기계-안강지역에서 북한군 제12사단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후 연대는 북한군을 격퇴하고 9월 13일에 부산으로 이동하여 함정에 승선했다. 9월 18일에 인천으로 후속 상륙하여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 주력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때에 서울에 남아 주요시설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한편 제2사단은 7월 20일 함창에서 해체되었다가 11월 7일 서울에서 제17, 제31, 제32연대를 예하 부대로 재창설되었다. 이동현 일병은 창설 요원으로 차출되어 제2사단 본부로 소속이 전환되었다. 이후 중공군 공격에 대비하여 포천 북방의 양문리-탑두울을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신정공세(일명 3차 공세)를 시작하여 서울을 압박했다. 사단 장병들은 다음날인 1951년 1월 새벽에 진지에서 이탈하여 7일에는 충주에 집결한 후 충주-단양 간 병참선을 경계했다. 이후 사단은 2월 13일에 안동으로 이동하여 일월산 및 보현산 일대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완수하고, 4월 28일에 청평 일대의 전방작전지역으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미 제9군단은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즉각 반격으로 전환하여 6월 중순에 육단리-적근산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유엔군사령관은 휴전협상을 지연시키면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는 공산군에게 군사적인 압력을 가하기 위해 각 부대에 공세적인 행동을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제2사단은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745고지를 탈취하기로 했다.
제2사단은 8월 2일 공격을 개시하여 745고지를 탈취했으나 중공군의 즉각적인 역습으로 고지쟁탈전이 8월 8일까지 계속되었으나 끝내 탈취하는 데 실패했다. 당시 이동현 일병은 본부 요원으로서 지휘소 경계 중에 적 침투부대의 습격을 받았으나 즉각적인 반격으로 격퇴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8월 12일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현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0면-21732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1-ㅎ-08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