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하(李東夏)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602291
  • 전몰일자 : 19530401

공훈사항

이동하 하사는 1933년 3월 2일에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에서 출생하였다. 이 하사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이 하사는 1951년 3월 24일에 입대 후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9사단 제28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하사의 입대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 공세)에 밀려 D방어선(평택-안성-장호원-원주-삼척을 잇는 선)과 E방어선(일명 황우선, 영월-삼척을 잇는 선)에서 적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제9사단은 1951년 3월 5일에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북상하는 북한군 제10사단을 3월 12일부터 18일까지 강원 정선군 송계리 일대에서 포위 격멸했다. 유엔군은 1951년 4월에 접어들어 캔자스선을 확보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5월 공세로 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선점되었다. 사단은 현리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속사리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9사단은 1952년 전반기까지 방어진지를 보강하면서 전투정찰과 수색, 매복작전을 지속하였다. 1952년 6월 21일에 대규모의 포로획득과 더불어 북한군의 공격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중공군 1개 연대병력 3,500여 명이 방어하고 있던 사단 정면의 500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9월에 접어들어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 격화되었다. 사단은 10월 6일부터 백마고지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 예하 제114·제112사단과 12차례의 백병전이 거듭되는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마침내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사단은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이 전투를 승리로 장식함으로써, 철의 삼각지 서남부에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전투를 마친 제9사단은 10월 26일에 진지를 미 제3사단에 인계하고 사창리에서 부대정비를 한 뒤 11월 25일에 제2사단 진지를 인수하여 김화지구의 저격능선 일대를 맡았다.
제9사단은 1953년에 들어 포격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자 주저항선과 전초기지의 교통호를 물결형으로 보강하는 한편, 전 유선망을 교통호 지하에 매설했다. 이 과정에서 이 하사는 1953년 4월 1일에 적의 기습에 당해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하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0-ㅎ-029)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