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필(李東弼)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920

공훈사항

이동필 경사는 1933년 12월 5일 전북 고창군 흥덕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북도경 고창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하동에서 전사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고창경찰은 전투태세를 갖추는 한편 주요시설 경비, 고창-부안, 고창-장성, 고창-영광을 잇는 주요 보급로 경비, 주요 시설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7월 12일 공주를 점령한 북한군 제4사단이 계속 남진하여 18일 7월 18일 강경을, 7월 20일에는 곡성을 점령한 후 일부 부대는 김제로, 일부는 전주로 남진함에 따라 전북도경은 7월 20일 남원으로 철수했다. 7월 20일 전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남원에 집결한 전북도경과 전북의 일부 지역 경찰은 임실 방면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에 대비하기 위해 육군부대와 합동 방어태세를 갖추고, 남원시 운봉에 진출한 함양경찰 병력과 합세하여 육십령 고개에 차단진지를 구축했다.
비상경비총사령부는 7월 31일 진주에서 경남경찰, 전남·전북경찰 혼성병력 4천여 명으로 전투부대를 재편성했고, 경찰부대는 미 제25사단 및 한국 해병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8월부터 9월까지 이 경사가 소속된 경찰부대는 고성·창원·함안·진동에서 북한군 제6·7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되자 각 도(道) 경찰도 경찰관서 수복작전에 나섰다. 고창경찰은 10월 1일 고창경찰서를 수복한 후 지역 내 치안유지활동을 강화하며 잔적소탕작전을 실시하였다.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공비섬멸 작전기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을 설정하여 전국적으로 공비섬멸을 하도록 했다. 이 경사는 제1-제3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제3차 작전이 종료된 후 고창경찰서로 복귀하여 지역 내 치안유지활동을 실시했다. 그러던 중 9월 20일 고창군 고수면에 공비들이 출몰하여 치안을 교란하며 민간인에 대한 약탈행위를 하자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경사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공비들을 토벌하던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필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50판-7면-06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7-ㅅ-069)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