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칠(李東七)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1125155
  • 전몰일자 : 19501122

공훈사항

이동칠 일병은 경상남도 밀양군 산외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이 일병의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를 고려할 때, 이 일병은 1950년 5월경 입대 후 제7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1950년 7월 5일 제7사단이 해체됨에 따라 제1연대는 수도사단에 편입되었고, 동년 10월 25일 제9사단이 창설됨에 따라 연대의 제2대대는 제9사단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제2대대 소속이었던 이 일병은 제9사단 직할부대에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이 일병이 소속된 제1연대는 7월 5일에 수도사단에 편입되어 7월 6일부터 평택-진천-청주-보은-안동 방면으로 지연전을 펼쳤다. 그러나 북한군 제12사단은 제8사단의 뒤를 따라 계속 공격해왔다. 이에 연대는 7월 31일부터 8월 1일까지 안동전투에 투입되어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며 낙동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이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낙동강 남쪽 반변천 일대에서 북한군과 교전 후, 1950년 8월 2일에 길안에서 방어선을 편성했다. 이에 북한군은 8월 5일을 기점으로 8월 공세를 개시했다.
연대는 진지 측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 제12사단과 전투를 이어가며 의성으로 철수했다. 그 결과로서 의성-영덕 사이에 큰 전선의 공백이 발생했다. 북한군 제12사단은 국군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고 청송-죽장-기계 축선으로 남하해 8월 9일에 기계를 점령하고 11일에는 포항을 점령했다.
북한군의 9월 공세 당시 연대는 경주 북방의 호명리 일대에서 9월 9일까지 북한군 제12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였다. 이에 따라 낙동강 전선의 최후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했고, 1950년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 10월 10일 원산을,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진했다. 한편 아군이 북으로 진격함에 따라 퇴로를 차단당한 적의 잔류 병력은 아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동시에 예기치 않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후방지역작전을 하던 미 제9군단과 예하 미 제2·제25사단은 청천강 선으로 투입되었다.
이후 사단은 1950년 11월 15일에 전북 금산군 남이면에서 1개 대대 규모의 공비를 소탕했고, 동년 11월 20일에는 상용리에서 적 200여 명을 포획 섬멸했다. 하지만 이후 진행된 공비소탕 작전에서 이 일병은 적탄을 맞고 후송되었으나, 1950년 11월 22일 끝내 사망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칠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7-ㄲ-032)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