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춘(李東春)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121347
  • 전몰일자 : 19510616

공훈사항

이동춘 하사는 1921년 8월 22일 서울시 중구 명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해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8월 25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
이동춘 하사는 낙동강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당시 전황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조국의 운명을 건 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계속되는 공방전에서 피아간 사상자가 크게 발생하였다. 낙동강선에서 아군이 총 반격작전을 수행하게 되자 이 하사와 장병들은 9월 중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청송-평창-양양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이 하사가 소속된 사단은 10월 1일 하조대 부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한 후 10월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한 후 함경북도 길주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동춘 하사와 장병들은 11월 말 길주에서 북한군이 반격해 오자, 12월 14일 함흥과 흥남으로 철수하던 중 벌어진 치열한 교전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후 17일 흥남에서 묵호항으로 해상 철수하였다.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동춘 하사는 강릉에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2월 25일부터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이 하사와 장병들은 3월 9일 속사리 일대 북한군 지역을 위력 수색해 북한군을 멀리 구축하였고 3월 26일 제2차로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으로 임진강과 화천저수지를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5월 7일 중공군 제6차 공세가 시작되어 설악산 부근의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동춘 하사와 장병들은 1951년 6월 3일부터 향로봉지구 전투를 실시하여 940고지를 점령하였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는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동춘 하사는 1951년 6월 16일 고성 부근 전투에서 북한군의 기습사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춘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46묘역-2판-1095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05-ㅈ-01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