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춘(李桐春)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0357427
  • 전몰일자 : 19501011

공훈사항

이동춘 이병은 경상북도 대구시 달성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이병은 1950년 8월 중순 육군직할 독립 제1유격대에 입대했다.
이 이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1950년 8월 동부전선의 포항지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차단하는 동시에, 인천상륙작전을 기만하기 위한 기습 상륙을 통한 양동작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가용부대가 없자 밀양에서 훈련 중이던 유격부대를 선정했는데, 이 부대가 바로 육군 독립 제1유격대(일명 명부대 또는 제772부대)였다. 이 대대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이명흠 대위가 주동이 되어 대구와 밀양 등지에서 모집한 대한청년단, 학도병 등 772명으로 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4개 중대로 편성된 대대였으나 적 기만과 부대원 사기를 고려하여 대대를 사단으로, 중대를 연대로 호칭하여 제28・29・32・37연대로 위장 편성하고, 계급도 위장했다.
제1유격대는 영덕 지구에 상륙하여 북한군 제2군단의 후방을 교란함과 동시에, 인천상륙작전을 기만할 목적으로 장사동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LST(미군은 상선으로 기록) 문산호는 9월 14일 오후 4시에 유격대대를 태우고 부산항을 출항, 9월 15일 새벽 5시경 장사동 부근 해상에 도착했다. 대대는 태풍 케지아로 인한 높은 파도와 아군의 상륙을 알아차린 북한군의 포격으로 완전히 육지에 착안하지 못하고 해안에서 20~30미터 떨어진 상태에서 상륙을 감행했다.
이 이병과 유격대원들은 상륙 후에도 적에게 포위되어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고, 그때마다 똘똘 뭉쳐 강한 투혼을 발휘하여 적을 물리쳤다. 하지만 적진 속에 고립된 가운데에서의 전투에는 한계가 있었다. 육군본부는 유격대의 철수를 결정했고, 한국 군함 조치원호와 미군 LST 2척 등이 장사동으로 파견되었다. 9월 19일 북한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한・미 해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구출작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670명을 구출하여 부산항으로 귀환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이병은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0월 11일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춘 이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83-ㅁ-04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