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초(李東初)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178371
  • 전몰일자 : 19511014

공훈사항

이동초 하사는 1929년 3월 8일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총공세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한 1950년 12월 19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후 제1사단에 배치되었다.
이동초 하사가 소속된 사단은 두포리-금곡리-무건리 선에 배치되어 적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였다. 예기치 못하였던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서울을 향해 시작되면서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37도선 평택까지 철수하였고 사단 작전명령에 의해 1951년 1월 말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이 하사는 수원, 의왕 거쳐 한강 서울 재탈환작전에 참전하여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였다. 그 후 사단은 38도선 부근을 향해 진격을 계속하였고 고양 임진강 전투에서 북한군과 조우하여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중공군은 또 한 차례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4월 22일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
이 하사와 사단 장병들은 1951년 5월 20일 문산-포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을 점령한 후 캔자스선상의 영평을 확보할 목적으로 사단을 문산 축선에 투입하여 병진공격을 개시하였다. 다음날(21일) 이 하사와 사단 병력은 문산천 북쪽의 가좌현 부근에 배치된 적의 박격포와 중화기 사격을 받아 문산천 도하에 실패하였다. 그로 인해 이 하사와 사단 병력은 적의 완강한 저항과 우천으로 인한 항공과 포병의 화력지원이 여의치 못하여 공격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6월에 접어들어 쌍방은 다시 형성된 38도선 부근의 새로운 전선(임진강구-연천-문산-율곡리)에서 상호 대치하게 되었으며, 전투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이후 10월 3일 이른 아침 1시간에 걸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오전 6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윤 하사와 사단 병력은 임진강상의 주진지를 확보한 가운데 적의 저항을 받지 않고 사미천 서안의 91고지와 146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하사와 장병 모두는 혼연일체가 되어 투혼을 발휘하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동초 하사는 1951년 10월 14일 임진강 부근 전투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초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40면-21722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14-ㅎ-01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