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철(李東喆)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5618
  • 전몰일자 : 19510101

공훈사항

이동철 중위는 1930년 6월 18일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중위는 장교가 되고자 육군종합학교에 보병사관 제4기로 입교하여 소정의 교육을 받고, 1950년 11월 5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7사단 제3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중위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유엔군이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을 준비하고 있었고, 제3사단은 개천 북방의 비호산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방어 중인 상황이었다. 11월 22일 사단은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묘향산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사단은 26일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았다. 중공군은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의 전투지경선으로 집중 돌파하여 아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제3연대는 덕천으로의 퇴로가 차단되자, 구장동으로 기동하여 미 제38연대와 합류하여 미 제2사단장의 승인을 얻어 구장동 전투에 참가했다. 국군 제2군단장은 전투력이 온전한 제3연대는 미 제2사단과 합동작전을 하도록 하고, 제7사단(-)은 순천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연대는 미 제8군 철수계획에 따라 12월 3일 승호리 일대로, 6일 신계를 거쳐 시변리로 철수했고, 계속해서 연천을 거쳐 12월 15일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38도선으로 철수한 미 제8군은 김포반도-임진강-화천-양양을 연하는 선을 주저항선으로 선정한 후 포천-김화 도로를 중심으로 중서부전선은 미군에, 동부전선은 국군에 방어임무를 부여했다. 한편 육군본부는 12월 15일을 기해 국군 제3사단의 방어종심을 보강하고, 유사시 증원부대로 운용하기 위해 홍천에서 정비 중인 국군 제7사단을 춘천으로 이동시켜 육군 예비로 확보했다. 이후 연대는 춘천 부근의 38도선 일대에 진지를 편성하고 방어준비에 매진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상급부대 계획에 따라 자은리를 거쳐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이 중위는 소대원을 이끌고 진지를 지키며 용감히 싸우다 적탄에 맞아 1951년 1월 1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철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그의 위패(47판-6면-25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1-ㄷ-02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