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철(李東轍)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3015
  • 전몰일자 : 19501230

공훈사항

이동철 일병은 경상북도 경산시 안동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몰 일자를 고려할 때, 이 일병은 1950년 6월경 입대 후 제8사단 제2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입대할 당시 제8사단 21연대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제3일간 강릉군을 방어하다가 대관령을 넘어 철수하게 되었다. 제21연대 장병들은 7월까지 충청북도 제천군, 단양군을 거쳐 죽령을 넘었고, 7월 말부터는 경상북도 일대의 중부 내륙지역의 산세를 따라 북한군에 대한 지연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1950년 8월 19일 용마산 방면으로 끊임없이 침투하였고, 제8사단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수색대를 파견하여 북한군의 역습을 격퇴했다. 제21연대는 9월 초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낙동강전선에서 국군의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제21연대와 제16연대 장병들도 북진에 합류하여 9월간 남한지역을 수복하고 10월 하순에는 평안북도 희천군까지 이르렀다가 제21연대와 제16연대 장병들은 11월간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했다. 제21연대는 제16연대와 함께 덕천에서 적의 좌측부분을 경계하다가 국군 제7사단에 진지를 인계한 후 영원으로 향했다. 제21연대는 11월 22일 영원 동쪽 문곡리에 도착하여 부대를 정비했다. 이어 제21연대는 영원부근 전투에 투입되었다. 영원 동쪽 30㎞ 문곡리 부근에서 소대규모 적 전초를 격파하고 수색전을 전개했다.
11월 24일부터 전 전선에서 아군이 전면공격을 개시하자 제21연대는 943고지∼902고지선 에서 25일까지 공방전으로 물리쳤다. 제8사단은 26일 새벽부터 공세로 이전한 중공군에 의해 제7사단 제8연대 정면이 붕괴되자 맹산으로 철수하면서 중공군과 접전을 계속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제8사단 장병들은 필사적으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철수했다. 이때 중공군 제38·제42군이 평안도 동부의 평야지대를 우회 침투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조기철수를 강요했다.
결국 중공군의 공세로 국군 및 유엔군은 평양 방면을 통해 38도선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제8사단은 1950년 12월 24일부터 이듬해 1월 6일까지 강원도 춘천시에서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방어했다. 중공군 제66군 소속 3개 사단이 국군 제8사단 방면으로 남하했다. 제21연대는 혹한의 상황에서도 지뢰와 장애물을 설치하며 적에 대한 지연전을 실시했으며. 결국 이 과정에서 이 일병은 1950년 12월 30일 중공군의 포격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철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12판-8면-25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0-ㅈ-06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