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진(李東鎭)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11006

공훈사항

이동진 순경은 1935년 1월 2일 전북 무주군 무풍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북도경 무주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무주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기습남침을 감행하자 전북도경은 비상경비체제로 전환하고 도내 관할 경찰관서로 하여금 전투태세에 돌입하도록 했다. 무주경찰은 금산-무주, 무주-김천, 무주-영동을 잇는 주요 도로 통제, 주요 시설 경비,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은 7월 18일 강경을 점령하고 이어서 7월 20일 곡성을 점령했고, 그 중 일부 부대는 김제로, 일부는 전주로 남하함에 따라 전북도경은 이날 남원으로 철수했다. 7월 20일 전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7월 21일 남원에 집결한 전북도경과 전북 북부지역 경찰은 임실 방면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에 대비하기 위해 육군부대와 합동 방어태세를 갖추고, 남원시 운봉면에 진출한 함양경찰 병력과 합세하여 육십령 고개에 차단진지를 구축했다. 육십령의 전북·경남부대의 저지선은 1개 연대규모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무너져 일부는 안의로 후퇴하고, 일부는 산복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7월 30일 진주가 포위되어 경찰 1,000여 명과 군병력 1,000여 명은 7월 31일 의령으로 철수했다. 합천으로 집결한 충남·서울·전북의 경찰병력은 일부는 고령으로, 일부는 창녕으로 낙동강 동안으로 이동했으며, 의령의 경남·전남병력은 함안-마산으로 철수하여 낙동강 방어작전에 일역을 맡게 되었다. 고령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작전에 임하고 있던 무주경찰은 8월 4일 함안으로 후퇴하여 낙동강 방어작전에 임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9월 16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되자 각 도(道) 경찰도 경찰관서 수복작전에 나섰다. 무주경찰은 10월 1일 무주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치안을 유지하며 잔적소탕작전을 실시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적 수행과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공비섬멸 작전기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을 설정하여 전국적으로 공비섬멸을 하도록 했다. 이 순경은 제1차-제3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0월 6일 무주 무풍면에 공비들이 준동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무주경찰이 출동하였으며, 이 순경은 이날 공비들을 소탕하던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진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50판-7면-07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7-ㄲ-09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