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주(이동주)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9703045
  • 전몰일자 : 19510519

공훈사항

이동주 일등중사는 출생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 발발 후 북한군이 낙동강 선까지 남진하여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8월 초순경, 대구에 위치한 육군중앙훈련소에 현지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7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동주 일등중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 공세를 힘겹게 저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제6사단은 경상북도 영천 일대 신녕 북방의 고지군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를 격퇴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유엔군사령부의 명령에 의거 9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해 전 전선에서 일제히 총반격작전을 실시했다.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후방이 차단된 것도 모르고 강력히 저항했으나, 9월 21일이 되자 퇴각하기 시작했다. 제6사단은 북한군을 추격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10월 5일에 38선을 돌파하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은밀히 압록강을 도하하여 적유령 산맥 일대에 숨어 있다가 10월 26일에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는 아군의 후방을 차단하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실시했다. 제7연대는 10월 27일부터 30일까지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중공군의 대병력과 맞서며 철수를 실시했다. 이동주 일등중사와 부대원들은 당시 험준한 산길을 따라 130km의 원거리를 분산되어 탈출하여 개천에 집결했다.
이동주 일등중사는 적이 차단한 포위망을 돌파 시 중상을 입고 평양에 위치한 제27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얼마 후 그는 건강을 회복하여 1951년 1월 하순경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 제7교육대로 전속되어 훈련병을 양성하는 조교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적 게릴라들에 의한 후방교란이 심하여 인근지역에 대한 공비소탕 작전에도 수시로 참가했다.
특히 12월 이후 중공군의 공격으로 전선이 38도, 37도선까지 남하하자 적 게릴라들의 주요시설 습격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으며, 중공군의 총공세와 때를 같이 하여 후방지역에서 더욱 적극적인 습격활동을 실시했다. 제1훈련소 제7교육대 기동타격대는 1951년 5월 19일에 한라산 일대 적 게릴라 소탕 작전에 출동했다. 이 전투에서 이동주 일등중사는 추격조장으로 조원들을 통제하며 적 게릴라들을 탐색하여 추격하던 중 은거해 있던 적의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주 일등중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3판-4면-1253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6-ㄲ-037)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