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재(李棟載)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2384
  • 전몰일자 : 19500803

공훈사항

이동재 일병은 충청남도 대덕군 유성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침투 및 교란으로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는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군 입대를 결심하고 1949년 12월 말에 옹진반도의 제17연대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에 배치되었다.
이동재 일병이 소속된 제17연대는 동년 11월 15일에 옹진반도로 이동하여 옹진지구전투사령부로 예속되어 제2연대로부터 38도선 경계임무를 인수했다. 연대는 64km의 정면에 2개 대대를 배치하고 1개 대대는 예비로서 옹진 부근에 집결시켰다. 얼마 후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면적인 포격에 이어 그들의 제6사단 14연대와 제3경비여단을 투입하여 공격했다. 연대 장병들은 병력 및 화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지연전으로 저항하다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6월 26일 아침 부포항에서 해군 LST에 승선하여 인천으로 철수했다.
제17연대 장병들은 인천에서 대전으로 이동하여 육본 경비임무를 수행하다가 6월 30일 오산과 평택 사이의 갈곶리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한편 미 지상군 중 최초로 투입된 미 스미스특수임무부대는 죽미령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이후 7월 5일 아침에 제17연대 장병들은 보은-상주로 이동하여 국군 제1사단과 합류했다. 연대는 7월 18일에 북한군 제15사단 주력인 제45, 48연대가 괴산에서 상주로 연결되는 화령장으로 투입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작전을 실시했다. 북한군들은 아군의 매복 사실을 모르고 매복지점 앞에서 경계를 소홀히 한 채 식사를 위해 집결했고, 연대 장병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격을 집중하여 적을 거의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당시 계속되던 후퇴 상황에서 장병들의 사기 앙양에 크게 기여했다.
이동재 일병이 소속된 제17연대는 7월 25일부로 수도사단으로 예속이 전환되어 예천-안동으로 이동하여 8월 1일에는 국군 제8사단의 안동 철수를 엄호했다. 이후 대구로 이동하여 육군 예비가 되었다. 북한군들은 대구공격에 앞서 무차별적으로 아군 집결지에 포병사격을 실시하고 또한 게릴라를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했다. 그는 8월 3일에 대구 일대에 침투한 적 게릴라를 소탕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재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2판-6면-22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6-ㅊ-06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