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을(李東乙)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20802

공훈사항

이동을 경사는 1925년 3월 25일 함남 정평군 신상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철도경찰 소속으로 재직 중 영등포에서 전사했다.
1949년 4월 22일 내무부 치안국은 직속으로 철도경찰본대를 두고 용산, 청량리, 인천, 개성, 대전, 곡성, 광주, 목포, 순천, 대구, 안동, 부산에 지방철도경찰대를 설치하여 운영했다. 철도경찰에게 부여된 주 임무는 철도역과 교량·연선(沿線)·터널 등 철도시설의 경계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개성 주둔 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 예하 3개 중대 병력이 분산 철수하자 개성철도경찰대 50명이 북한군을 저지하고, 경의선 개성역을 사수하기 위한 전투를 수행했다. 북한 정규군 대비 전투력의 상대적인 열세로 고립된 경찰대원들은 적진을 향해 최후 돌격을 실시했으나 탈출한 3명을 제외하고 모두 북한군의 집중사격으로 장렬하게 전사했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철도경찰대 본대는 6월 28일 서울에서 철수하였고, 전선이 남으로 이동함에 따라 국군과 함께 축차적으로 수원-천안-대전-대구 등지로 이동하면서 철도역과 교량·연선(沿線)·터널 등 철도시설의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9월 16일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작전을 감행함에 따라 철도경찰대도 각 지역별로 전선 상황을 고려하여 수복작전에 참여했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서울철도경찰대는 서울지역 내 철도역 기능 점검, 터널 주변의 잔적 소탕과 터널 내 적이 설치한 폭발물 제거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1951년 1·4 후퇴로 인하여 제천까지 후퇴했던 서울철도경찰대는 3월 15일 서울이 재수복되자 서울로 상경하여 기존의 임무를 수행했다.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공비섬멸 작전기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을 설정하여 전국적으로 공비섬멸을 하도록 했다. 이 경사는 태백산 지구에 파견되어 제1차-제3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 후 이 경사는 서울로 복귀하여 서울지역 철도경비임무를 수행했다.
1952년 8월 2일 10여 명의 공비들이 영등포 경찰서와 영등포역을 기습하자 영등포 지역 관할 경찰과 철도경찰병력이 출동하여 공비소탕작전을 실시했다. 이 경사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공비 2명을 사살하고 계속 작전을 수행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을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3-ㄱ-032)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