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우(이동우)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1203919
  • 전몰일자 : 19500625

공훈사항

이동우 일병은 경상북도 월성군 연곡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을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8년 5월 30일 제2여단 제2연대에 입대하여 복무하다 제7사단으로 전속되어 공병대대에 배치되었다. 제7사단은 적 주공방향으로 판단된 의정부 축선의 양주군 적성에서 사직리까지 47km 정면의 38도선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 일병이 입대한 이후 북한의 남침징후가 높아짐에 따라 육군본부는 경계강화 지시를 수차례에 걸쳐 거듭 하달했고, 그는 진지공사와 훈련, 경계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다.
사단은 6·25전쟁 발발 당시 동두천 축선에 제1연대를, 포천 축선에 제9연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사단의 예비였던 제3연대가 1950년 6월 15일부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고, 대신 제2사단 제25연대가 사단에 예속되었으나, 주둔지 수용시설 문제로 아직 충남 온양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사단은 예비연대가 없는 상태에서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반면에 북한군은 사단 정면에 주공인 제1군단의 주력을 투입했다. 북한군은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제203전차연대 1개 대대를, 포천 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투입했다. 사단은 북한군의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 무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병력 면에서는 7배, 화력 면에서는 18배나 우세한 적과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 일병이 소속된 공병중대는 즉각 제9연대 지역에 투입되었다. 연대 정면에는 철조망과 목책 장애물은 설치되었으나 지뢰는 매설되지 않은 상태였다. 적의 기습공격에 공병중대는 추가 장애물을 설치할 여유도 없이 제9연대 장병들과 함께 보병전투에 휩쓸렸다. 제9연대와 공병중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적 전차의 공격을 막을 길이 없었고, 전투력도 워낙 열세했다. 방어 첫날 주저항선이 붕괴되었고, 장병들은 25일 오후 4시경 포천을 내주고 광릉 일대로 분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병은 내 손으로 조국을 지켜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다 전쟁 첫날인 6월 25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우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8판-4면-18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6-ㅂ-09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