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식(李東植)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682880
  • 전몰일자 : 19530123

공훈사항

이동식 하사는 1931년 11월 27일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38도선 일대에서 전선이 고착된 시기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분연히 일어섰다. 이 하사는 1952년 1월 9일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37교육보충연대에 배치되었다.
한편, 1951년 7월 10일 최초로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회담이 진행되자, 한·미는 미군 재보충이 어려운 상황과 휴전 후의 한국 국방을 고려하여 1952년 초부터 육군의 규모를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증편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4월 28일 3개의 경장비 교육보충연대(제37·38·39연대)가 창설되었고, 6월 13일 다시 같은 성격의 3개 연대(제50·51·52연대)가 창설되었다. 이 중 제37연대는 독립연대로서 전선을 맡은 미 제9군단 예비로 투입되었다. 당시 미 제9군단은 철원, 김화 축선을 담당하고 있었고, 연대는 교육훈련을 하면서 후방지역에 대한 수색정찰과 보급로 확보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군 증편안이 추진되는 가운데 10월 30일 2개 사단의 증편계획이 확정되자, 육군본부는 11월 8일 위의 6개 경보병연대를 중장비 연대로 개편함과 아울러 6개 경보병연대(제53~제59교육보충연대)를 또다시 창설했다. 그리고 같은 날 강원도 양양에서 제12, 제15사단을 창설했다. 이때 제12사단은 제53·55·56교육보충연대를 잠정 배속하여 창설되었다가, 12월 10일부로 이들 연대를 배속 해제하고, 중장비 연대로 개편 완료된 제37·51·52연대를 건제부대로 편성했다.
사단은 12월 18일 인제로 이동하여 교육훈련을 끝내고, 12월 27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30일 미 제45사단과 임무 교대하여 서화 축선의 812-854고지를 잇는 선의 주저항선을 인수했다. 진지교대 직후 연대 정면의 북한군 제1사단은 국부적인 공격을 가해왔고 연대는 이를 격퇴했다.
이후 연대는 큰 전투가 없는 가운데 진지를 보강하면서 위력수색, 매복작전 등을 지속했다. 이 하사는 1953년 1월 23일 소규모 적이 침투공격을 해오자 분대원을 이끌고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다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식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그의 위패(44판-7면-05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5-ㄹ-00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