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식(李東植)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2103464
  • 전몰일자 : 19500628

공훈사항

이동식 일등중사는 1929년 6월 25일에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광복을 맞이했으나 정부수립 준비로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8년 6월 24일, 그는 강원도 강릉의 제10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그는 통신병으로 차출되어 1948년 8월 26일에 서울 영등포에 설치된 육군통신학교로 입교하여 통신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육군직할 제51통신가설대로 배치되었다. 그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제6사단을 직접 지원했다.
통신은 군조직 운영에 있어서 필수적인 기능이기 때문에 1946년 6월 15일 국방경비대 통신과와 통신소를 설치하는 동시에 예하부대인 원주, 청주, 대전 등지에 있는 각 연대와 통신업무를 개시하였다. 이러한 통신업무의 개시로 통신기술병의 양성이 시급해졌다. 그리하여 1947년 1월 20일에 경남 진해시 해안경비대 기지내에 조선경비대 통신교육대가 설치되었다가 해체되고, 1948년 8월 26일에 서울 영등포에 통신학교가 설치되었다.
제7연대 장병들은 화천에서 춘천에 이르는 도로상에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대전차 예비진지를 구축하고, 소양강과 춘천 분지를 감제할 수 있는 164고지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전쟁 발발 1개월 전인 5월 하순에 공사를 마쳤다. 이처럼 제6사단은 비교적 다른 사단보다 방어준비태세를 철저히 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전면적인 남침을 했을 때, 이동식 일등중사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사단과 연대 간 통신유지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북한군 제2사단은 약 1시간에 걸친 공격준비사격으로 아군 방어진지에 집중하여 무력화한 다음에 SU-76자주포(당시 전차로 오인)를 앞세워 공격했다. 이제 제7연대는 춘천 북방에서 3일간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6월 27일 오후 1시부터 춘천에서 철수하여 원창고개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제7연대는 춘천에서 철수하면서 통신이 끊겨 연대에 적정보고를 할 수 없었다. 이에 이동식 일등중사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6월 28일에 사단과의 통신망 유지를 위해 출동했다가 적 부대의 기습공격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식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1판-2면-10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0-ㅂ-02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