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식(李東植)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4386
  • 전몰일자 : 19501201

공훈사항

이동식 일병은 충청북도 중원군 살미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소백산맥 선까지 남진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1950년 7월 하순경 부산에 주둔 중이던 제1교육대에 입대했다.
한편, 개전 이래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7월 16일부로 각 편성관구사령부 예하에서 무기와 장비 보충이 없는 상태에서 신편(신병 모집) 중이던 연대들을 신병교육대로 개칭했다. 이에 따라 전북편성관구사령부 예하 제3연대가 제1교육대로 개칭되어 전주에서 부산으로 이동하여 경남편성관구사령부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 8월 14일에 육군본부 직할로서 부산에서 제2훈련소가 제1·5교육대 병력과 제9교육대 일부 병력을 기간으로 창설되었다. 이때 단기간의 신병교육을 마친 이 일병은 제1교육대 조교로 배치되었다.
이동식 일병이 입대할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소백산맥 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하자 낙동강 선에서 최후방어전을 펼치고자 했다. 유엔군은 8월 1일부로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여 최후의 방어에 임했다. 8월 중순 이후 전선이 왜관-수암산-유학산-군위-보현산을 잇는 대구 북방에 형성됨으로써 이에 호응하여 부산 지역에 대한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더욱 극심해졌다. 유엔군의 북진으로 다소 약화되었던 게릴라들의 활동은 중공군이 참전하고 유엔군이 38도선으로 철수하면서 다시 활발해졌다. 당시 부산에는 각종 지원부대, 정부기관 등이 밀집되어 있었고, 유엔군 병력과 물자들이 하역, 집결되고 있어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당시 전선 상황이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군은 신병교육대 교관·조교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게릴라들의 활동에 대응했다. 12월 1일 부산 시내에 적이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 일병과 기동타격대원들은 이들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소탕작전에서 이동식 일병은 적 게릴라를 추적하다 적들의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식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18판-3면-12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84-ㅈ-02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