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식(李東植)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7801583
  • 전몰일자 : 19521001

공훈사항

이동식 이등중사는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12월 1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동식 이등중사가 전선에 배치될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두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총공세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한 상황이었다. 이동식 이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1951년 1월 송계리-삼척선으로 철수한 후, 2월 3일 공격을 개시하여 2월 7일 강릉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2월 11일에 개시된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전 전선이 밀리게 되자 송계리-삼척 선으로 철수하였다. 2월 25일 중공군의 저항이 경미하여 사단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연대병력을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하여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평창 일대에서 대관령 방향으로 조심스러운 반격작전을 계속해 설악산으로 진출하였다. 6월 4일 적은 강력한 박격포 사격의 엄호하에 이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의 전초진지인 산두곡산과 원봉 전장의 1209고지를 공격해 왔으나 치열한 격전을 펼쳐 격퇴시켰다.
1951년 8월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고지쟁탈전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미 제8군의 작전에 참가하여 서화리 동북방의 924고지를 점령하였다. 그 후 이동식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10월 12일에 시작된 전투에서 북한군 제19사단으로부터 월비산을 탈취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952년 지형능선과 수도고지에 대한 제한공격이 무위로 끝난 후 전선은 8월 초까지 교착상태에 접어들었다. 이후 9월 6일 북한군은 맹렬한 공격준비사격과 더불어 각각 1개 중대 병력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지형능선상의 전초소대는 오후 9시경 수명의 생존자만이 철수하면서 능선을 북한군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이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9월 20일까지 수차에 걸친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진지를 사수하였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던 이동식 이등중사는 1952년 10월 1일 금성 지구전투에서 치열한 백병전을 펼치던 중 북한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식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06-ㅍ-07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