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술(李東述)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128419
  • 전몰일자 : 19511104

공훈사항

이동술 하사는 경상북도 금릉군 어모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을 향해 북진작전을 실시하던 1950년 11월 중순,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2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동술 하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12월 중순, 제6사단은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준비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얼마 후 사단은 12월 31일 야간에 중공군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큰 피해를 받고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장호원 일대로 이동했다.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를 평택-안성-삼척 선에서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이후 제6사단은 중공군의 2월 공세, 4월 공세, 5월 공세를 격퇴하고, 용문산 방어진지로부터 반격을 시작했다.
제6사단은 1951년 5월 24일부터 계관산-북배산 방향으로 공격하여 5월 26일 춘천 동북방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28일에 화천저수지까지 진출했다. 잠시 부대정비를 실시한 후 6월 6일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10일에는 취봉(987고지)을 탈취하고, 15일에는 백암산까지 진출했다. 이후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지연시키면서 군사력 증강에만 집중하자, 유엔군사령관은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전 부대에 공세적인 행동을 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제6사단은 백암산 전방에 위치한 등대리 부근의 819고지-462고지를 탈취하기로 했다.
이동술 하사가 소속된 제2연대는 8월 31일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9월 1일까지도 점령하지 못하고, 9월 21일부터 재차 공격하여 결국은 819고지를 탈취했다. 더 나아가 제6사단은 금성천 부근을 장악하기 위해 10월 13일에 백암산에서 제7·제19연대가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제2연대 장병들은 예비로 후속하다가 10월 16일에 전방연대를 초월하여 중공군을 격파하고, 21일에 교암산(770고지)까지 진출했다. 이후 교암산 방어진지를 10월 30일에 미 제24사단에 인계하고, 제2연대는 사단 예비로 용호동 일대에 위치하며 수색작전 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그가 소속된 소대는 11월 4일에 수색작전 중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술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24687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02판-3면-18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4-ㄹ-07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