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수(이동수)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336570
  • 전몰일자 : 19510407

공훈사항

이동수 하사는 경상북도 포항시 대신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낙동강 선까지 철수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이 하사는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그는 9월 초순경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5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3사단 제22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하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북한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일진일퇴의 격전 끝에 북한군을 공격을 물리치고 반격준비에 들어갔고, 제3사단도 연일 탈환 후 반격 태세 준비 중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국군은 9월 16일 총반격작전으로, 9월 22일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 하사와 연대 장병들은 파죽지세로 나아가 강릉(30일)을 탈환하고, 10월 2일 38도선을 돌파하여 일일 평균 24km의 속도로 북진하여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다. 연대는 11월 11일부터 길주-백암-혜산진으로 북진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12월 10일 흥남에서 해상철수하여 구룡포에 상륙했다.
제3사단은 12월 20일경 홍천으로 이동하여 소양강 변의 관대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전 전선에 걸쳐 제3차 공세를 감행했고, 연대 전방에는 북한군 제2사단이 투입되었다. 적의 집중공격에 맞서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진지가 돌파당했다. 1951년 1월 4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수원-이천-원주 선까지 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연대도 군단 작전명령에 따라 평창으로 철수했다. 연대는 1월 15일부터 19일까지 영주 남대리 부근으로 침투한 북한군 제31사단을 격멸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은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감행했다. 이때 연대는 횡성의 섬강 일대에서 중공군 제197사단과 혈전을 벌였다.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적의 집중공격으로 진지가 돌파당하고, 전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12일 원주로 철수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3월 7일부터 31일까지 리퍼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연대는 제3군단에 배속되어 평창군 하진부리, 유천리 일대를 점령하고 계속 공격하여 3월 말 38도선 상의 현리-하림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고, 연대는 4월 중순 인제군 한계리 일대까지 진격했다. 이 공격전에서 이 하사는 분대원을 이끌고 앞장서서 전진하다 4월 7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수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4판-5면-14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3-ㅌ-03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