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수(李東洙)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377039
  • 전몰일자 : 19510917

공훈사항

이동수 하사는 서울시 서대문구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이 하사는 1951년 2월경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5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 이어 김해에 있는 육군공병학교에서 공병 주특기교육을 이수한 후 제1201건설공병단에 배치되었다. 제1201공병단은 1950년 8월에 제1공병단을 개칭한 부대로서 육본 직할부대로 육군을 일반지원했다.
이 하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하 유엔군)이 공세작전을 전개하여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계속 공세를 유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제1201건설공병단은 전방 군단 후방지역에서 다양한 공병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유엔군은 4월 초순 공세를 전개하여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군은 제5차 공세를 개시했다. 적은 중공군과 북한군을 총동원하여 서부 및 중부전선(개성~화천)에 주공을 투입한 4월 공세(4. 22.~30.)와 중동부전선(양구~인제)에 주력을 집중한 5월 공세(5. 16.~22.)를 감행했다.
유엔군은 적의 공세를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잇는 선에서 저지한 후, 공세로 전환했다. 유엔군은 5월 말에 세 번째로 38도선을 회복하고, 중부전선에서는 와이오밍선(연천~철원~김화)을, 중동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신 캔자스선(화천저수지~펀치볼~향로봉~간성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유엔군은 5월 말부터 캔자스선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6월에 1차 완성을 했다. 이때 1201건설공병단은 전방 사단 공병대대를 지원하는 한편, 보급로와 비행장 확장 및 신설 작업에 진력했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이후 전투 양상은 대규모 작전 없이 고지쟁탈전으로 변모되었다. 이 시기 전선은 동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미군 군단이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국군 공병부대는 동해안 지역에 집중 지원되었다.
제1201건설공병단은 동해안의 주문진 일대에서 주보급로 보수·유지에 주력했다. 이 하사는 분대원을 이끌고 앞장서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군 작전에 기여했으나, 1951년 9월 17일 주문진 남방에서 주보급로 보수 작업 중에 적의 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수 하사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32727 육)을 추서하고, 유해(24묘역-5판-8274)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6-ㅇ-09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