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수(이동수)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12834
  • 전몰일자 : 19510907

공훈사항

이동수 중위는 출생 일자 및 장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소속부대, 계급과 군번 등을 고려할 때, 그는 전쟁 직전 1950년 6월 중순에 국가의 간성이 되기 위한 큰 뜻을 품고 동래의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였다. 그는 단기간의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1950년 8월 30일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제1사단 제15연대 수색대 소대장으로 보직되었다.
이동수 중위가 전선에 부임할 무렵인 1950년 10월 하순 사단은 운산 주변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중공군과의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청천강 남쪽의 신안주 부근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제15연대는 11월 24일 북한군 병참선의 요충인 태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동수 중위의 지휘하에 연대병력은 12월 7일 사리원에서 남천으로 이동하여 구월산 일대에서 패잔병을 소탕하였다. 이후 위천리, 구화리 일대의 축차적인 지연 진지를 점령하여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지역내 패잔병 소탕작전을 실시하고 철수가 완료되자 14일에는 고량포-적성 일대에 배치되어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이후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면서 이동수 중위와 연대병력은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37도선 평택까지 철수한 후 1월 31일부터 안양 남쪽의 수리산-모락산을 공격하여 개시 5일 만에 치열한 백병전을 치른 끝에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3월 16일에는 한강을 도하하여 시내로 진출함으로써 서울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동수 중위와 연대병력은 5월 20일 문산-포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을 점령한 후 문산 축선에 투입되었다. 이 중위와 연대 장병들은 고봉산 부근에서 경미하게 저항하는 북한군을 격퇴하고 일산을 경유 금촌으로 진출하였다. 7월 10일부터 시작된 판문점에서는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었으나 전투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 중위와 연대병력은 수색정찰대 운용을 강화하였고, 제한된 규모의 공세적인 전투정찰도 실시하게 되었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며 장병들에게 솔선수범하는 훌륭한 소대장이었다. 이동수 중위는 일부 병력과 정찰활동을 하던 도중 북한군과 조우하여 사격전을 전개하며 고군분투하였으나 끝내 방어하지 못하고 1951년 9월 7일 장단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수 중위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95557 육)을 추서하고 유해(15묘역-7판-26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11-ㄷ-00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