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수(李東守)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35001
  • 전몰일자 : 19510301

공훈사항

이동수 일병은 1929년 4월 1일 경상남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격퇴하던 1950년 9월 20일 육군에 입대하여 미 지상군지원 한국군(KATUSA)으로 차출되어 근무하다가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동수 일병은 평양 진격전에 투입되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10월 9일에 고랑포를 출발하여 접적 없이 동북쪽으로 진격, 38도선 북쪽에 위치한 마전리를 점령하였다. 박 일병과 장병들은 10월 23일 안주 일대에서 청천강을 도하한 후 24일 오전 10시 30분 전차 1개 소대가 용산동 후방으로부터 돌입하면서 북한군 전차를 격파하자, 남·북에서 협공을 받은 북한군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운산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간목표인 영변과 용산동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청천강 남쪽의 신안주 부근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사단은 11월 20일 태천-구성-삭주-신의주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24일에는 적 병참선의 요충인 태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적은 사단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교량을 파괴시켰고, 또 도로상에는 도처에 120mm 박격포탄으로 만든 부비트렙을 매설하였다. 사단 공병이 이를 제거하는데 다소 시간이 지연되었으나 적의 저항이 경미하여 저녁 무렵에는 태천을 남쪽과 동쪽에서 포위하게 되었다. 이후 12월 31일 임진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한 중공군은 후속 부대를 도하시켜 연대를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이 일병과 연대병력은 사격도 하지 못한 채 방어진지 돌파당하였고, 중공군이 내륙 깊숙이 침투함으로써 사단의 우전방 지역에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이동수 일병과 연대병력은 1951년 1월 1일 두포리-금곡리-무건리 선에 배치되어 중공군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였다. 이후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면서 그가 소속된 사단은 1월 4일 서울에서 37도선 평택까지 철수한 후 수원, 의왕 거쳐 한강 서울 재탈환작전에 참전하였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동수 일병은 1951년 3월 1일 여의도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41판-6면-23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13-ㅂ-03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