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수(李東洙)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21718
  • 전몰일자 : 19500805

공훈사항

이동수 일병은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읍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정부수립 전후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조국과 자유를 지키고자 1949년 9월경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본부 교도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무렵 북한군은 유격대를 침투시켜 후방교란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고, 이 일병은 육군본부 경계에 최선을 다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남침하자 육군본부는 부족한 병력과 장비로 이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제1사단과 제7사단이 방어했던 문산과 의정부 축선이 너무 쉽게 무너져 육본 직할부대를 의정부 지역에 중점적으로 투입하여 서울 북방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했다. 육군본부는 본부 직할의 모든 재경부대를 동원해 전방의 제1사단과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증강했다. 육본은 수도사단 예하 제3연대를 제7사단에 배속한 데 이어 오후에는 제18연대(-1)마저 추가로 배속하였으며, 제8연대를 제6사단에 배속해 가평지구로 투입했다.
그리고 6월 26일 저녁에는 육본 교도연대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시켜 창동 지역에 배치했다. 육본 교도연대는 창동 일대에 투입되었으나, 빈약한 장비와 탄약으로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6월 27일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워 창동 방어선에 돌입하자 전차를 파괴할 수 없는 국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일병과 일부 장병들은 철수하여 육군본부로 복귀했다.
육군본부는 6월 27일 시흥으로 철수했다가 7월 1일 수원(농업시험소)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북한군이 계속 남진함에 따라 7월 4일 대전으로 철수했다가 7월 14일 대구로 이동하여 국군을 지휘통제했다. 이 일병과 교도연대 장병들은 육본의 이동에 따라 함께 이동하며 경계에 만전을 기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1일부로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여 최후의 방어에 임했다.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대구 지역에 대한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더욱 극심해졌다. 당시 대구에는 정부기관과 육군본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등이 밀집되어 있어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8월 5일 적 게릴라들이 육군본부를 습격했고 이 일병은 이들을 맞아 용감하게 앞장서서 싸우다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08판-1면-19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0-ㄷ-09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