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수(李東洙)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9300595
  • 전몰일자 : 19510113

공훈사항

이동수 이병은 전라남도 담양군 무정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북한군의 남진에 밀려 소백산맥 선까지 후퇴하자, 1950년 7월 중순 조국을 지키고자 제3교육대에 입대했다. 제1교육대는 전북지역에서 신병모집을 하던 제9연대를 7월 16일부로 개칭한 부대였다.
한편, 제8연대는 8월 20일 대구에서 제7사단이 창설되면서 제3·5연대와 함께 재창설되었고, 이 이병은 제8연대에 배치되었다. 9월 2일 시작된 북한군의 공세(9월 공세) 때 연대는 대구 북방의 신녕지구 전투와 영천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이병과 연대 장병들은 북한군 제15사단과 13일까지 뺏고 뺏기는 혈전 끝에 영천을 탈환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때 연대는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충주를 거쳐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후, 김화-평강-율리를 거쳐 18일 승호리 일대에서 대동강을 건너 김일성대학과 모란봉 일대로 진격했다. 연대는 20일 북한군 제17, 제32사단의 잔적을 소탕함으로써 연대는 제1사단과 더불어 최초로 평양을 점령한 부대가 되었다.
10월 29일 북진을 계속한 연대는 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다. 연대는 11월 1일 공격을 개시했으나, 중공군의 역습에 밀려 평안남도 개천 동북방의 비호산 일대를 점령하여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3일 연대는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7일까지 치열한 전투 끝에 비호산을 지켜냄으로써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1월 14일 연대는 덕천으로 진격했고,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연대는 26일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이후 연대는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2월 15일 춘천 동북방의 38도선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적의 압도적인 공격에 밀려 자은리를 거쳐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이병은 진지를 사수하다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951년 1월 13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수 이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51-ㄹ-04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