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수(李東秀)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K1100264
  • 전몰일자 : 19520202

공훈사항

이동수 이등중사는 1927년 2월 26일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8월 16일 육군에 입대하여 미 지상군지원 한국군(KATUSA)으로 차출되어 근무하다가 국군 수도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동수 이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청송-평창-양양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38도선을 회복하였다. 이어 10월 1일 하조대 부근 38도선을 돌파한 후 함경북도 길주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그와 연대병력이 삼척으로 철수해 강릉 부근에 배치되었을 때인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동수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후 강릉에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2월 25일부터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그와 장병들은 3월 9일 속사리 일대 적 지역을 위력 수색해 북한군을 멀리 구축하였고 3월 26일 제2차로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캔자스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5월 6일 중공군 제6차 공세가 시작되어 설악산 부근의 연대 주저항선이 돌파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동수 이등중사와 연대는 1951년 8월 27일 924고지와 884고지를 점령한 다음 9월 6일에는 향로봉-건봉산-까치봉-송현리를 방어하게 되었다. 이후 10월 12일 오전 6시 월비산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과 10시간의 격전 끝에 오후 4시경 351고지를 점령한 다음 148고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북한군이 계속적인 저항을 함에 따라 결국 목표를 점령하지 못하고 351고지로 철수하였다. 추계공세작전에서 월비산을 탈취하고 남강까지 진출한 연대는 11월 16-17일에 후방지역의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창설된 백야전사령부에 배속되어 호남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최후까지 용감히 싸웠던 이동수 이등중사는 1952년 2월 2일 운봉 부근 공비토벌 작전 임무를 수행하던 중 공비들의 기습사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수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40판-3면-10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5-ㄲ-09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