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수(李東洙)

  • 군별 : 육군
  • 계급 : 병장
  • 군번 : 0100784
  • 전몰일자 : 19510501

공훈사항

이동수 병장은 충청남도 대덕군 구칙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남진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다. 이 병장은 1950년 8월 30일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3연대에 배치되었다.
제7사단은 신녕지구 전투와 영천 전투에 투입되어 북한군 제15사단을 격멸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최후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경주-안동-문경-충주-장호원-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다. 연대는 개천 일대의 비호산에서 3일부터 7일까지 중공군 제112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했다. 연대는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고, 이후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을 거쳐 12월 15일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38도선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연대 정면에는 북한군 제10사단이 공격을 가했다.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북한군 제2군단이 영월로 진출함에 따라 연대는 1951년 1월 19일부터 적과 치열한 교전 끝에 24일 영월을 탈환하고 퇴각하는 적을 섬멸했다. 2월 11일 개시된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 때, 연대는 16일 북한군 제2군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평창 일대를 내주고 후방으로 후퇴했다. 적은 계속해서 영월을 점령하려고 기도했으나, 연대는 17~18일 양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과 리퍼작전(3. 7.~3. 31.) 때 연대는 평창군 백석산과 백적산 일대에서 북한군 제27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3월 12일 평창군 하진부리를 점령했다.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연대는 공격을 전개하여 4월 중순 인제 서쪽의 관대리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 4월 공세(4. 22.~30.)에 밀려 인제 서남방의 부평리, 정자리 일대까지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이 병장은 진지를 지켜내며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다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5월 1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수 병장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52-ㄱ-04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