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선(이동선)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4255
  • 전몰일자 : 19510422

공훈사항

이동선 중위는 1929년 4월 30일에 출생했다(출생 장소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던 1950년 9월 초순경, 경상남도 동래에 설치된 육군종합학교로 입교하여 소정의 군사훈련 과정을 수료한 후 10월 중순경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5사단 수색대로 전속되었다. 당시 수색대는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 및 보고하거나 지휘소를 습격하고 탄약고 등 주요시설을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동선 중위가 부대에 전속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이 북진작전을 한창 진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제5사단은 1950년 10월 8일 재창설 후 10월 13일부터 영남 일대의 적 패잔병 및 게릴라를 토벌하는 작전에 투입되어 11월 22일까지 후방지역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가평지역 상천역 부근으로 이동하여 11월 30일 가평을 공격하여 탈환했다. 그 후 사단은 12월 2일 잔적의 거점인 춘천을 공격하여 탈환하고 북으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가평 북쪽의 지암리와 화천 부근의 잔적을 소탕했다. 북진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다시 38도선으로 후퇴했다. 이에 사단은 12월 5일경 17번 국도상의 춘천 지역에 배치되어 평양-서울 간 도로의 동측방에 대한 엄호작전 후, 12월 13일부로 춘천 북방 38도선 일대의 전선 방어(탑두울-배후령)에 투입되었다.
마침내 중공군은 1951년 1월 1일 새벽에 공격(일명 신정공세)을 개시하여 사단의 후방을 차단하였으며, 1월 2일 밤에 사단은 적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러나 부대원들은 포위망을 돌파하여 가평, 문막을 거쳐 제천-영월로 이동하여 방어 배치를 전환했다. 그 후 사단은 중공군 2월 공세 시 횡성 일대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적의 공격을 안흥 일대에서 저지해 냈다. 3월 3일 사단은 美 제10군단에 배속되어 태기산 전투(3월), 인제 부근 전투(4월)에서 적을 격퇴하며 장평-봉화봉을 잇는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단은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에 밀려 다시 소양강 남단으로 철수했다. 이동선 중위는 복무기간 중 수색대원을 지휘통제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중공군 4월 공세를 저지하려고 4월 22일 인제 부근 방어진지에서 교전하던 중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선 중위의 혁혁한 전공을 표창하여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91559 육)을 추서하고,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장병1묘역-206판-2246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4-ㅂ-025)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