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석(李東石)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756104
  • 전몰일자 : 19520710

공훈사항

이동석 하사는 1925년 11월 27일에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로 38도선 일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1951년 10월 30일, 강원도 양양에 위치한 제5사단에 현지 입대하여 수색대로 배치되었다. 당시 수색대는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여 보고하거나 지휘소를 습격하고 탄약고 등 주요시설을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동석 하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과 그 북방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편 중공군의 1951년 5월 공세 이후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은 군사작전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1951년 7월 10일 최초로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에 따라 양측은 대규모작전을 자제했고, 전쟁은 휴전회담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작전과 전선 개선, 그리고 휴전 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양상으로 변모되었다.
제5사단은 강원도 양구 일대 가칠봉 전투에서 박달고개-가칠봉-서희령 전선을 굳게 지켜 해안분지(펀치볼)확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로써 사단은 40일간이나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북한군 3개 사단을 맞이하여 교전과 혈전을 벌인 이 전선을 10월 20일 국군 제3사단에 인계하고 양양으로 이동했다. 이후 사단은 1952년 1월 12일까지 인근 지역에 대한 수색정찰과 매복작전을 병행하다가, 1월 13일부로 제1군단에 배속되어 동해안 거진으로 이동했다.
그 후 사단은 1월 23일부터 제11사단의 전선을 인수하여 554고지-351고지-감호 일대를 잇는 전선방어에 투입되었다.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47・제9사단으로서 적은 월비산을 확보한 상태에서 그 남쪽의 351고지를 비롯한 사단의 전초진지와 주저항선을 공격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사단은 좌측 전방에 제36연대, 우측 전방에 제35연대를 배치하고 제27연대를 예비로 집결 보유했다.
북한군은 소규모 수색정찰 활동을 하는 등 전선은 7월 초순까지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마침내 적 제9사단은 7월 10일 야간 10시에 대규모의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351고지를 집중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이동석 하사는 7월 10일 351고지 일대에서 분대원을 진두지휘하며 방어진지를 사수 중 적 포탄에 맞아 안타깝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석 하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7판-2면-19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4-ㅌ-065)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