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석(李東奭)

  • 군별 : 육군
  • 계급 : 대위
  • 군번 : 15229
  • 전몰일자 : 19500828

공훈사항

이동석 대위는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에 예비군인 호국군 간부로 임관되었으나, 호국군이 해체될 때에 예현1차로 입교하여 소정의 군사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10월 20일에 소위로 임관되어 서울 용산의 제19연대 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 이후 연대는 1950년 4월 19일에 제6사단에 예속되어 원주로 이동하여 사단 예비로 교육훈련과 부대정비에 주력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6월 25일 새벽 기습남침을 감행했을 때, 이동석 대위가 소속된 제19연대 본대는 원주에서 기차로 청량리를 거쳐 26일 새벽 5시에 춘천에 도착했다. 연대는 제7연대를 증원하여 춘천지역의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6월 27일에 홍천 방면의 제2연대를 증원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킨 후 6월 30일 오후에 홍천에서 원주로 철수했다.
제19연대는 7월 1일 야간에 이천지역으로 긴급히 투입되어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킨 후 7월 4일에 진천으로 철수하였고, 7월 9일에 수안보로 이동하여 사단에 합류했다. 이후 제6사단은 7월 12일 조령과 이화령을 포함한 문경지역 방어에 돌입하여 문경-점촌-함창 일대에서 북한군 제1, 제13사단을 맞아 31일까지 지연전을 실시했다.
제19연대 장병들은 8월 1일 새벽에 낙동강을 건너 용기동 ~양곡동간 능선 일대를 점령하여 적의 공격을 수차례에 걸쳐 격퇴하고, 8월 6일에 철수하여 선돌주막 남쪽의 236고지를 새로운 방어진지로 점령했다. 북한군이 8월 8일에 선돌주막 부근까지 진출하자, 이곳에서 연대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8월 13일에 군위, 의흥을 경유해 매봉산과 산운동 일대로 철수했다. 북한군 제1사단은 8월 15일부터 전차로 증강하여 지속적으로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동석 대위가 소속된 제19연대는 적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했으나 피해가 증가하여 8월 21일에 민부대와 진지교대를 통해 사단 예비가 되었다. 이 시기에 북한군이 조림산 북쪽의 고지를 무혈점령하여 신녕은 피탈 위기에 처했다. 그가 소속된 연대는 8월 26일에 신속히 신녕지역으로 투입되어 28일까지 계속된 전투로 적의 공격을 격퇴하는데 기여했다. 이날 그는 중대장으로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석 대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91574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47판-3면-10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9-ㅊ-07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