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상(이동상)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51922
  • 전몰일자 : 19510524

공훈사항

이동상 일병은 1930년 9월 30일에 출생했다(출생 장소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3차 공세로 평택-삼척 선으로 철수하여 반격을 준비하던 1951년 1월 중순,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수색대에 배치되었다.
이동상 일병이 부대로 전입하기 전,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24일과 11월 24일에 두 차례나 압록강을 향한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와 ‘크리스마스 공세’)를 실시했으나, 그때마다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큰 피해를 받고 38도선 부근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당시 제6사단은 12월 중순에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를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고, 이때 12월 31일 야간에 시작된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의정부와 서울 창동을 거쳐 장호원 부근의 적산리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후 사단은 1951년 2월 초에 문막 북쪽의 판대리 일대로 이동하여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사단은 2월 12일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를 판대리 방어진지에서 격퇴하고 즉각 반격으로 전환했다. 당시 수색대는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여 사단에 보고하고, 때로는 적 지휘소 및 탄약고 등을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동상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2월 22일, 제6사단은 반격작전으로 북한강까지 진출했고, 3월 22일부터는 북배산-수덕산-지암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4월 6일에 화악산을 좌우로 연하는 선에 도달했다. 이후 사단은 철의 삼각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4월 21일에 공격하여 사창리까지 진출했으나,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로 후방이 차단되면서 큰 피해를 받고 가평을 거쳐 4월 27일에 용문산 일대로 철수했다.
제6사단은 대규모 중공군의 공세가 임박한 징후들이 곳곳에 나타나자, 전초진지를 강화하여 주진지로 위장하고, 용문산 주방어진지는 즉각 반격으로 전환할 태세를 갖추었다. 예상대로 중공군은 5월 16일부터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이에 제6사단은 전초진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5월 20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했다. 이동상 일병이 소속된 수색소대는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5월 24일에 적 지휘소를 타격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치열한 전투로 그곳을 이탈하는 데 성공했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상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39면-21690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6-ㄴ-05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