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무(李東茂)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33601
  • 전몰일자 : 19510627

공훈사항

이동무 일병은 1927년 5월 20일에 경상남도 마산시 교원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 총공세로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평택-삼척 선으로 철수한 시기인 1951년 2월 말경, 부산에 설치된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카투사로 선발되어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미 제8군에 배치되었다가 육군의 병력배치조정에 의해 제2사단 제17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동무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때, 제2사단은 안동-속리산-제천 일대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4월 초까지 후방지역 소탕작전을 마무리하고 4월 28일에 청평 일대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그가 소속된 사단은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하기 위한 방어작전에 참가했다. 당시 공산군의 작전목적은 주공을 동부 전선으로 지향해 그곳에 집중된 국군을 격멸하여 미군을 고립시킴으로써 향후 휴전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춘계공세(4월, 5월)를 서울 북방-마석-용문산-홍천-하진부리-대관령-강릉을 잇는 선에서 저지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동무 일병이 소속된 제2사단은 군단계획에 따라 적의 주력부대와 예비대가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섬멸하기 위하여 최대한 신속히 반격하기로 했다. 이에 사단은 5월 20일을 기해 미 제24사단의 가평 진출을 엄호하고, 5월 24일 오전 7시에 일제히 공격했다. 일명 가평-화천 진격전을 실시한 것이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시작된 이후 계속된 수세에서 벗어나 38도선을 향해 일제히 공격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미 제9군단은 5월 31일까지 전곡-철원-김화-화천을 잇는 와이오밍 선을 확보했다. 제17연대 장병들은 사창리-다목리-김화에 이르는 계곡통로의 우측 능선을 따라 공격하여 6월 14일에 적근산(1073고지)을 점령하고 방어로 전환했다. 이후 쌍방간에 휴전협상이 논의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이에 방어진지를 준비하면서 수색정찰 활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동무 일병이 소속된 소대는 6월 27일에 방어진지 전방에서 수색정찰 활동을 하다가 침투한 적 정찰대를 발견하여 격멸했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무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19-ㅅ-03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